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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오류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원인 배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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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원인 배경

이슈킨 2019. 4. 18. 18:04

안녕하세요.  <사실과 오류>입니다.

 

일명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전봉준"全捧準"은 1854년(또는 1855년이라고도 함) 전라도 고창군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명좌"明佐" 호는 해몽"海夢"입니다.

 

몰락한 양반가의 출신으로 태어난 "전봉준"은 집안이 매우 어려웠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공부를 했으며 13세에는 "백구시"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녹두"라는 별명은 전봉준의 체구가 유난히 작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후 전봉준은 마을에서 지식인으로 통했기 때문에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한약을 지어주고 또는 여러 가지 관련된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30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한 것으로 알려진 정봉준은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 종교인 "동학"은 현재의 "천도교"로 과거 신분을 나누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은 특히 농민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은 극도의 혼란기로 외세가 무분별하기 유입되고 부패한 관리가 판을 치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

 

정봉준은 동학에 입교한 동기를 밝히기도 했는데 "동학은 경천수심의 도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된 것은 1892년 4월 고부 군수로 부임하게 된 탐관오리"조병갑"이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며 재산을 수탈하는 악행을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전봉준의 아버지도 "조병갑"에 저항하다가 체포되는 일이 었었는데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한달만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일을 멈춰줄 것을 상소했지만 고부군수 "조병갑"은 멈추지 않았고 정봉준은 1893년 11월 김도삼, 최경선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계획합니다.

 

전봉준을 선두로 1894년 2월 관아로 쳐들어가 "조병갑"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관련 장부를 불태우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고부 민란)

 

sbs 드라마 <녹두꽃> 전봉준(최무성)

 

이후 조정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신임 군수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며 농민들은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과격한 진압과 함께 모든 책임은 동학교도들에게 돌리며 탄압을 시작하자 1894년 3월 다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규합하여 재봉기 합니다.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모인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하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났고 부안, 정읍, 흥덕, 고창으로 진격했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마저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게 되면서 조선은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정봉준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5월 4일에 조정과 협상하게 됩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일본의 침략과 만행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농민전쟁은 정부군과 일본군에 패하며 진압되었고 이후 정읍에 피신하고 있다가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순창군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894년 전봉준 압송 모습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고문에도 기개"氣槪"를 잃지 않고 1895년 3월 30일(양력 4월 24일) 40세의 나이에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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